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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만세운동, 2025년 ‘6월의 독립운동’으로 선정 - 학생들의 항일 외침이 민족운동의 불꽃이 되다
  • 기사등록 2025-06-01 22: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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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국장 광경 우편엽서 '대여' (자료=독립기념관)

[한국의정신문 김미라 기자]


국가보훈부는 1926년 6월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전국적으로 전개한 항일 만세시위인 ‘6·10만세운동’을 2025년 ‘6월의 독립운동’으로 선정했다고 5월 30일 밝혔다.


이번 선정은 지난해 4월부터 1개월간 국민 추천을 받아 이뤄졌으며, 황무지 개간권 반대운동(1904), 헤이그 특사 파견(1907), 봉오동 전투(1920) 등과 함께 최종 후보에 올랐다. 이 가운데 6·10만세운동은 학생들의 조직적 참여와 전국 확산성, 3·1운동과 광주학생운동을 잇는 역사적 의미를 인정받아 선정됐다.



순종 국장, 항일의 촉매로


6·10만세운동은 1926년 6월 10일, 고종의 뒤를 이은 순종의 국장일을 기점으로 일어났다. 당시 조선 전역은 국왕의 서거로 깊은 애도에 잠겼고, 이를 계기로 전국적인 만세시위를 계획하는 민족적 움직임이 일어났다.


당시 민족주의·사회주의·종교계 인사들은 ‘대한독립당’ 결성을 도모하며 5만 장의 격문 인쇄 및 배포를 준비했지만, 일제에 발각되어 무산됐다. 그러나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을 중심으로 한 별도의 계획은 서울 지역 학생들에게 전달되며 본격적인 시위로 이어졌다.


서울에서는 중앙고보, 중동학교 등 주요 중등학교 학생들이 창덕궁 돈화문을 시작으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문을 뿌렸고, 일제의 강경 진압 속에 200여 명이 체포되는 등 큰 충돌이 있었다. 이 운동은 곧 지방의 학교들로 확산돼, 동맹휴학과 항일 저항으로 이어졌다.



민족운동의 물줄기를 잇다


6·10만세운동은 침체된 민족독립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 운동을 계기로 학생들은 항일운동의 주체로 부상했고, 이후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국적 확산으로 이어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또한, 계층과 이념을 넘어선 참여는 신간회 결성(1927)에 정신적 토대를 제공했으며, 이는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전민족적 항일 투쟁의 흐름을 이어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국가보훈부 관계자는 “6·10만세운동은 학생들이 중심이 된 자발적 항일운동이자, 이후 독립운동의 전환점이 된 역사적 사건”이라며 “이번 선정을 계기로 청소년 세대에게 독립정신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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