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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6·3] ⑦ 한 표의 품격: 투표는 권리가 아닌 책임입니다
  • 기사등록 2025-05-20 11:49:15
  • 기사수정 2025-05-20 12:5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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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정신문 김현주 기자]


민주주의 사회에서 투표는 기본권이다.
그러나 그 기본권이 너무 당연한 권리로만 여겨질 때, 투표는 쉽게 소비되고 가볍게 행사되곤 한다.


선거일에 맞춰 나들이 가듯 투표소에 들러 기분에 따라 고르고, 누군가의 권유나 여론 흐름에 따라 결정하고 돌아오는 일이 반복된다면, 그 한 표는 권리가 아니라 책임 회피의 도구가 될 수 있다.


투표는 행사하는 것이 끝이 아니라, 그 선택의 결과를 함께 감당하겠다는 책임의 표현이다. 한 사람의 투표가 정책의 방향을 바꾸고, 제도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며, 공동체의 미래를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곤 한다.



‘권리’는 말하지만 ‘책임’은 말하지 않는 사회


선거가 다가오면 정치인들은 유권자에게 “투표는 당신의 권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당신의 선택은 책임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는 정치인은 드물다.


사실상 투표는 권리인 동시에 권력에 대한 위임 행위이다. 그 위임의 대가가 불합리한 정책, 무능한 행정, 독단적인 권력 행사로 되돌아올 수도 있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우리가 뽑은 사람을 통해 시행되는 정책은 결국 우리 스스로의 선택에서 비롯된 결과다.
“누가 뽑았느냐”를 따지기보다 “내가 어떤 기준으로 뽑았느냐”를 스스로 물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투표는 국가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을 드러내는 일


우리는 흔히 투표를 통해 '정권을 바꾼다', '세상을 바꾼다'고 말하지만, 사실 투표는 그보다 더 개인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에서 출발한다.


"나는 어떤 사회를 원하며, 어떤 가치를 우선시하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하는 행위, 그것이 바로 투표다.


투표는 단순히 ‘그 사람’을 선택하는 일이 아니다. 그 사람을 통해 나의 신념과 가치, 우선순위가 사회에 드러나는 방식이다. 누군가는 공정을, 누군가는 복지를, 또 다른 누군가는 성장과 안정을 택할 것이다. 각자의 선택은 단지 한 표가 아니라, 그 사회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세상에 내보이는 선언이다.


예컨대, 기후 위기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는 유권자는 탄소중립 공약을 우선적으로 살펴볼 것이며, 청년 세대의 불안을 체감하는 사람은 주거·일자리 정책의 세부사항을 더 무겁게 판단할 것이다.


결국 그 선택은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가' 못지않게, ‘어떤 나라에 살고 싶은가’라는 나의 대답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투표는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을 인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내가 행사한 한 표가 더 나은 정책과 제도를 낳을 수도 있고, 혹은 불합리한 권력과 실망스러운 정치로 돌아올 수도 있다.


그 결과가 어떻든, 나는 그 선택의 일부로서 책임을 공유하게 된다.


그러므로 투표는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자기 인식의 정치적 표현이며, 사회를 함께 설계하는 시민적 실천이다. 그리고 그것은 “누굴 찍을까”보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할 때 비로소 깊어진다.



감정의 투표에서 기준의 투표로


정치에 대한 실망과 냉소가 깊어질수록, 투표는 이성보다는 감정에 기대기 쉬워진다.
“이번엔 그냥 바꿔보자”, “그래도 저쪽보단 덜 나쁘다더라”, “어차피 다 똑같아” 같은 말들이 우리 주변에서 쉽게 들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감정에 의존한 선택은 단기적인 분풀이가 될 수는 있어도, 장기적인 방향을 바꾸는 힘이 되긴 어렵다. 감정으로 선택된 정치인은 감정에 기대는 정치를 한다. 그는 대중의 기분을 살피며 움직이고, 이슈를 키워 주목을 받고, 갈등을 이용해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방식으로 정치를 운영할 가능성이 높다. 그 결과는 사회 전체의 안정과 발전이 아니라, 갈등과 소모의 반복일 수 있다.


성숙한 민주주의에는 성숙한 유권자의 태도가 필요하다.


정책의 내용, 실현 가능성, 후보의 태도와 과거 행보를 종합적으로 살펴야 한다. 지금 나에게 중요한 사회 문제는 무엇인지, 그 후보는 해당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고 어떤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 ‘공약은 그 후보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투표는 ‘좋은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방향을 고르는 것’이라는 점도 중요하다. 정치는 결국 완벽한 사람을 고르는 일이 아니라, 불완전한 현실 속에서 가장 나은 가능성을 선택하는 과정이다. 우리가 감정이 아닌 기준으로 투표할 때, 정치는 대중의 기분이 아닌 공공의 미래를 중심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순간, 한 사회의 정치 수준은 조금씩 높아지기 시작한다.



품격 있는 한 표가 바꾸는 것


한 표는 작고 조용하지만, 그 안에는 정치의 품격, 시민의 수준, 그리고 공동체가 지향하는 가치와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표가 단단할수록 정치는 가벼워지지 않고, 그 표가 무거울수록 국가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무거운 한 표는 충동과 유혹에 휘둘리지 않고, 선동에 눈을 감지 않으며, 신념과 기준 위에 놓인다. 반대로 아무렇게나 던져진 가벼운 한 표는 결국 사회 전체를 무겁게 만들 수 있다. 그 무게는 뒤늦게 비효율적인 정책, 무책임한 리더십, 분열과 갈등의 대가로 돌아온다.


우리는 종종 투표율만으로 선거의 성패를 평가하지만, 진정한 민주주의의 깊이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참여했는가’보다, ‘얼마나 성찰한 끝에 한 표를 던졌는가’에 달려 있다.

 

투표는 숫자만의 게임이 아니다. 그 안에 담긴 유권자의 태도와 시선이 정치를 바꾼다. 정치는 결국 선택이 누적된 결과물이다. 무심한 선택이 반복되면 정치의 질도 반복되고, 단단한 선택이 축적되면 정치의 언어도, 문화도, 방식도 진화한다.


유권자의 눈높이가 높아지면, 정치는 더는 대충 말하고 행동할 수 없게 된다. 투표가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행사될 때, 정치는 더 이상 감정과 선동에 기댈 수 없다. 그때 비로소 정치는 ‘국민을 설득하고 책임지는 일’로 바뀌기 시작한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한 장면이 아니라, 그것의 전체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누구를 찍느냐만큼 중요한 것은, 왜 찍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 이유가 단단할 때, 우리의 한 표는 단순한 참여를 넘어 책임 있는 공동체 구성원의 선언이 된다.


정치는 품격 있는 한 표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품격은, 나 자신으로부터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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